Endings

베르나데타 (Solo)

아버지를 대신하여 발리 백작위를 계승한 베르나데타는 영내에 틀어박혀 결코 국정에는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느긋하게 자치령만 통치하는 그 자세는 이후의 당주들에게도 대대로 이어져, "오소리 발리"라는 별명을 남기게 되었다.

벨레트 & 베르나데타

은설의 장
취풍의 장

벨레트K0은K1는K2 포드라 통일 왕국의 초대 왕에 취임하는 한편, 베르나데타와 혼인을 발표하였다. 당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리 백작위를 계승한 베르나데타가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지 않을까 우려하였으나, 예상과 달리 실제로 그녀는 새 왕과 함께 살면서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한편 베르나데타의 낯가림은 평생 개선되지 않아, 그녀가 겁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새 왕에게 등용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예상 외의 행보를 보이며 새 왕의 통치를 도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감식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벨레트 & 베르나데타

창월의 장

벨레트K0은K1는K2 세이로스 성교회의 대사교로 취임하는 한편, 베르나데타와 혼인을 발표하였다. 당초,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리 백작위를 계승한 베르나데타가 자신의 영지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지 않을까 우려하였으나, 예상과 달리 실제로 그녀는 대사교와 함께 살면서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한편 베르나데타의 낯가림은 평생 개선되지 않아, 그녀가 겁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교단에 등용된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예상 외로 대활약하며 교단 운영을 도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감식안이 드러나게 되었다.

벨레트 & 베르나데타

홍화의 장

벨레트K0과K1와K2 베르나데타의 혼례가 성대하게 치러지기 무섭게, "어둠에서 꿈틀대는 자"와의 전쟁이 재차 시작되었다. 당초, 많은 사람들이 발리 백작위를 계승한 베르나데타가 영지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할까 우려하였는데, 예상과 달리 그녀는 포드라에 진실된 평화를 찾아 주고자 싸움터를 전전하는 남편을 따라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무서운 전장에 계속해서 몸을 던진 베르나데타는 서서히 성격이 변하여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게 되었고, 훌륭하게 남편을 뒷받침하였다고 한다.

에델가르트 & 베르나데타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작위를 계승한 뒤, 전력으로 영내에 틀어박히려던 베르나데타의 꿈은 허무하게 깨졌다. 신생 아드라스테아의 황제, 에델가르트가 그를 허용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 생애를 포드라 통치에 헌신한 그녀는 자신의 곁에 늘 베르나데타를 두었다. 그것은 이따금 과도하게 냉철해지는 자신에 대한 훈계였던 모양인데, 베르나데타 역시 그 역할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앙바르의 궁성에 매일 같이 울리던 그녀의 희로애락이 담긴 비명에 사람들은 태평한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하였다고 한다.

휴베르트 & 베르나데타

신생 아드라스테아 제국의 새로운 궁내경 휴베르트와, 새로운 발리 백작 베르나데타의 혼인은 뜻밖의 조합인 탓에 제도 내뿐 아니라 온 나라에서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었다. 휴베르트는 황제 에델가르트의 오른팔로서 일하는 한편, 발리령의 경영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결혼을 계기로 성격이 바뀐 베르나데타는 제국 전체가 자치령이라도 된 듯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럭저럭 활약을 하였다. 포드라를 지키기 위해 그늘에서 싸우는 데 세월을 바친 두 사람의 가슴에는 똑같이 정교한 자수로 꽃이 피어 있었다고 한다.

페르디난트 & 베르나데타

홍화의 장

전쟁이 끝난 직후, 발리 백작위의 계승권을 포기한 베르나데타는 정식으로 에기르 공작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와 혼인을 올렸다. 두 사람은 에기르 공작령의 개혁에 착수하여 서로 협력하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고, 영내는 서서히 부흥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그 공적으로 재상의 지위에 오른 페르디난트는 영내를 아내에게 맡기고 제국 전역의 개혁에도 매진하였다. 영내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어리광쟁이 아내를 위하여 그는 빈번하게 제도와 자치령을 오가는 처지에 놓이게 됐으나, 그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페르디난트 & 베르나데타

Not 홍화의 장

전쟁이 끝난 직후, 발리 백작위의 계승권을 포기한 베르나데타는 에기르 공작위를 되찾은 페르디난트와 혼인을 올렸다. 두 사람은 에기르 공작령의 개혁에 착수하여 서로 협력하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고, 영내는 서서히 부흥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포드라 전역의 통치에도 관여하게 된 페르디난트는 영내를 아내에게 맡기고 포드라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영내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어리광쟁이 아내를 위하여 그는 빈번하게 제도와 자치령을 오가는 처지가 되었으나, 그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린하르트 & 베르나데타

홍화의 장

전후, 린하르트와 베르나데타는 작위 계승권을 함께 포기하고 단둘이 영지에서 도망쳤다. 실상 사랑의 도피가 된 이 행동은 세간에 소소한 소동을 일으켰으나, 당사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가르그 마크 대수도원에 기거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제국의 관리 하에서 교단의 변혁과 재건이 진행되자 대수도원에서도 사관학교가 재개하여, 기묘하고 이상한 부부가 교편을 쥐게 되었다. 한 명은 졸면서 걷고, 먹고, 책을 읽는 교사였고, 다른 한 명은 강의 때 외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고 틀어박혀 있는 교사였다고 한다.

린하르트 & 베르나데타

Not 홍화의 장

전후, 린하르트와 베르나데타는 작위 계승권을 함께 포기하고 단둘이 영지에서 도망쳤다. 실상 사랑의 도피가 된 이 행동은 세간에 소소한 소동을 일으켰으나, 당사자들은 신경 쓰지 않고 가르그 마크 대수도원에 기거하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대수도원이 재건되면서 사관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후 기묘하고 이상한 부부 교사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한 명은 졸면서 걷고, 먹고, 책을 읽는 교사였고, 다른 한 명은 강의 때 외에는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고 틀어박혀 있는 교사였다고 한다.

카스파르 & 베르나데타

카스파르와 베르나데타는 온갖 우여곡절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겪은 결과, 발리 백작위를 이어받은 베르나데타에게 카스파르가 장가를 드는 형태로 맺어졌다. 베르나데타는 카스파르가 무슨 일을 저지를 때마다 그에게 약속을 들이댔는데, 결국 이렇게 쌓인 약속의 일부는 『베르나데타의 47개조』로서 후세까지 남게 되었다. 그 중 하나인 「아이들의 수를 셀 때, 절대로 나를 착각해서 함께 세지 말 것」이라는 조항을 보면, 아이들의 수가 많았으며 두 사람의 사이도 매우 좋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베르나데타 & 펠릭스

창월의 장

전후, 펠릭스는 돌아가신 부친 로드릭을 이어 프랄다리우스 공작이 되었다. 베르나데타는 발리 백작위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펠릭스와 결혼하였고,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하였다. 영지가 부흥을 이룬 뒤에도 펠릭스는 왕의 오른팔로서 각지에서 분주하였다. 그가 성을 비운 동안, 베르나데타는 남편을 대신하여 방에 틀어박히면서도 열심히 사무를 처리했다고 한다. 퍼거스 북부의 한랭 기후는 틀어박히기 좋아하는 베르나데타의 성질에 박차를 가했으나, 펠릭스의 귀환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방을 박차고 나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베르나데타 & 펠릭스

Not 창월의 장

전후, 혼자서 여행을 떠나려던 펠릭스는 베르나데타의 간청으로 여행을 포기하고, 그녀가 계승한 발리 백작가에 사위로 들어갔다. 부부 사이는 아주 원만하였는데, 펠릭스가 수행을 하겠다며 오그마 산맥에 들어가겠다고 말했을 때에는 베르나데타가 눈물로 말리며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베르나데타가 저택에 틀어박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펠릭스를 새 영주라고 생각한 영민들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증명하듯 후세에 남은 서류 중에는 발리 백작 펠릭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베르나데타 & 라파엘

베르나데타는 아버지를 대신해 발리 백작위를 계승하였으나, 영내에 틀어박혀 결코 국정에는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 라파엘이 나타났다. 그는 베르나데타가 타인과 교류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베르나데타가 남긴 수기에 따르면 그것은 「시중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형벌이었다」고 하나 과감한 조치가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는 영주로서 영민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윽고 중앙 정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성대하게 열린 그들의 결혼식에는 더 이상 낯을 가리지 않는 신부와 근육을 자랑하는 신랑이 있었다고 한다.

베르나데타 & 세테스

세테스는 전쟁 이후로도 대수도원에 머물면서 교단의 재건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한편, 발리 백작위의 계승권을 포기한 베르나데타는 대수도원에 틀어박히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세테스는 직무 틈틈이 우화를 창작하여 교회에 제공하였는데, 그것이 호평을 얻어 보람을 느낀 그는 교단의 재건이 일단락되자 직무를 그만두고 우화 작가가 되기로 하였다. 이후 포드라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을 위해 다수의 우화를 집필하였다. 그의 작품은 삽화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작가에 대해서는 아무리 물어도 「집에 있는 아내」라고만 대답하였다고 한다.

베르나데타 (Solo)

베르나데타 did not die

가르그 마크의 전투 이후 중병을 얻어 틀어박혔다. 약속의 날에 합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르나데타 (Solo)

베르나데타 did not die

<년>년 <Month> <전장>에서 사망.

예리차 & 베르나데타

홍화의 장

종전 후, 예리차는 "어둠에서 꿈틀대는 자"와의 사투에 몸을 던졌다. 사신의 투구로 맨 얼굴을 감추고 거대한 낫으로 전장을 휩쓰는 모습은 적과 아군 모두가 두려워했다고 한다. 싸움이 끝난 후 그는 아무도 모르게 종적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발리령을 찾은 한 명의 객인이 있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작위를 이은 베르나데타는 저택에 틀어박히는 나날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객인의 방문을 기점으로 둘이서 영내를 돌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담아낸, 그녀 자신의 작품이라고도 불리는 그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율리스 & 베르나데타

발리 백작위를 이은 베르나데타는 저택에 칩거하여 통치에 난항을 겪는다. 그리고 그때 발리령을 찾은 율리스와 재회한다. 베르나데타는 그를 붙잡은 채 떨어지지 않았고, 끝내는 그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 결혼에 영민들은 곤혹을 표하였는데, 그중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율리스 본인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 결혼을 계기로, 남편에게 끌려나온 발리 백작이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민중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상황은 호전되었다. 베르나데타는 영내 경영의 재능을 꽃피워, 그럭저럭 괜찮은 영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